2024년 우수고객 안내
고객님을 위한 우수 고객 전용 서비스는
MY교보 > 혜택 > 교보 노블리에 서비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고객님을 위한 우수 고객 전용 서비스는
MY교보 > 혜택 > 교보 노블리에 서비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키보드 Crtl버튼과 마우스휠 "상하"로 움직이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
사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명언은 최영 장군의 말이 아니라 사헌규정(司憲糾正) 벼슬을 지낸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임종시에 어린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고려사》 열전의 최영(崔瑩)편 말미 부분에 그 내용이 나와있다.
初瑩年十六, 父臨終戒之曰, “汝當見金如石.”
최영의 나이 열여섯 때 부친이 죽었는데 임종 때에,
“너는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瑩佩服, 不事産業, 居第甚隘陋, 處之怡然.
최영이 그 유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거처하는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服食儉素, 屢至空�, 見乘肥衣輕者, 不�如犬豕.
의복과 음식이 검소했으며 쌀궤가 늘 비었지만
살진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는 자들을 보면 개나 돼지만도 여기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최영 장군의 묘를 둘러보기 전에, 백과사전을 참고하여 최영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동주(철원), 시호는 무민(武愍),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최영의 서녀(첩의 딸)가 우왕의 후궁이 된 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지만,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조선 초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은 그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이의 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며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최영의 ‘사람됨’이다.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간 사람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최영과 같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고려사에 언급된 최영에 대한 평가를 좀 더 살펴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장군과 재상을 겸직하고 오래 동안 병권을 장악했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항상 큰일에만 신경을 써 사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군사들을 지휘했으나 휘하의 사졸 가운데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고려사》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의 건국주도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자신의 역사관을 가지고 만든 고려 왕조에 대한 역사서다. 따라서 철저히 고려를 부정하는 조선의 관점에서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국부(國父) 이성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최영에 대한 평가가 위와 같다는 것은 최영의 사람됨이 정말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의 저택에 손님들을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열고 진기한 음식을 대접하며 사치를 부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영도 언젠가 재상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는데, 한낮이 지나도록 아무 음식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쌀밥도 아닌 기장쌀을 섞어 지은 밥에다 잡다한 나물만을 차려서 가져왔다. 오래 기다리다 지쳐 배가 고팠던 재상들은 그것도 마다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최영의 집에서 먹은 음식이 여태껏 먹었던 어떤 산해진미보다 가장 맛있습니다' 그러자 최영은 웃으며 '이것도 병사들을 부리는 한 방법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한자로 된 옛날 사람의 비석을 읽을 때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최소한 묻힌 사람의 이름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석의 제일 마지막 부분은 대체로 OO지묘(之墓)로 끝난다. 누구 누구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 앞의 글자가 무덤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름을 홍길동(洪吉童)처럼 쓰지는 않는다. 성과 이름을 분리하되 성 다음에는 공(公)자를 쓰고, 이름 앞에는 휘(諱)자를 쓴다. 홍길동을 예를 들어보면, 홍공 휘길동(洪公諱吉童)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휘(諱)는 피한다는 뜻으로,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서 비롯됐다. 반대로, 살아있는 분의 이름을 말할 때는 절대 휘(諱)자를 쓰면 안 된다. 대신 함(銜)자를 써 "할아버지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존함을 여쭤봐도 되나요?"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이름 앞의 모든 내용은 그 사람이 평생 동안 거쳤던 관직이 대부분이다. 이 부분은 띄어쓰기만 잘 하면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최영 장군의 비석내용을 살펴보면 철원부원군까지는 모두 관직 이름이고 시호가 무민(武愍)이며 본관이 동주(철원)라는 뜻이다. 그 다음은 부인이 왼쪽에 묻혀 있다는 뜻이다.
高麗 盡忠奮佐命安社功臣 判密直事 大將軍 門下侍中
고려 진충분좌명안사공신 판밀직사 대장군 문하시중
贊成事 六道都巡察使 鐵元府院君 謚武愍 東州崔公 諱瑩之墓
찬성사 육도도순찰사 철원부원군 시무민 동주최공 휘영지묘
三韓 國大夫人 文化柳氏 俯左
삼한 국대부인 문화유씨 부좌
최영 장군에 얽힌 설화는 꽤 많다. 그 중 하나는 충북 보은에 전해 내려오는 말무덤과 말채나무 이야기다. 최영 장군에게는 무예를 배울 때 항상 타고 다니면서 애지중지 하던 말이 있었다. 하루는 큰 뜻을 품고 수도인 개성으로 떠나기 전, 말의 주력을 시험하기 위해 화살을 쏜 뒤 채찍질을 하며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이미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최영 장군은 “너 같은 느린 말로는 도저히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하며 단 칼에 말의 목을 쳤는데, 그 때 화살이 하나 날아왔다. 알고보니 꽂혀 있던 것은 전날 연습할 때 쏘았던 화살이었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크게 후회하며 말을 묻어주고 그 옆에 채찍을 묻어주었는데, 후에 말무덤 옆 채찍에서 잎이 나와 나무(말채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는 최영 장군이 사윗감을 고르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최영 장군은 훌륭한 사윗감을 골라 내기 위해 자기가 먼저 재주를 보여주면서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했는데, 그 재주는 놀랍게도 ‘스스로 자기 목을 자르고 나서 떨어진 목을 다시 붙여서 소생하는 것’이었다. 혼인 승낙을 받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찾아온 딸은 아버지가 재주를 부려 다시 살아나면 자신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떨어진 아버지의 목에 매운 재를 뿌려 다시 붙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최영 장군의 신비스런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의 최후를 암시하고 있다.
시호 중에서 근심할 민(愍) 자가 들어간 사람은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게 많이 쓰인다.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 장군의 시호는 무민(武愍)이며, 간신 김자점에게 죽은 임경업 장군의 경우도 충민(忠愍)이다. 어이없게 암살당한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고,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죽은 것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혼을 제사 지내던 곳으로 홍제원 근처에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맞아 싸워서 항상 이겼던 최영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대단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최영과 관련된 일부 지명과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민간신앙이다.
앞서 말한 충북 보은의 말무덤 말채나무 이외에도 부산에는 감만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18세기의 기록물에는 감만동을 `감만이(勘彎夷)`로 표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감(戡)은 ‘물리치다’라는 뜻이고, 만이(彎夷)는 동쪽과 남쪽의 오랑캐(동이,서융,남만,북적) 즉 왜구란 뜻이다. 따라서 감만동은 왜구를 물리친 곳을 의미한다. 감만동에는 무민사(武愍祠)라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최영 장군의 시호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그 밖에도 수영성 동문 밖에는 무민사, 자성대 공원에는 최영 장군의 사당을 두어 왜구를 섬멸한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굳이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이유 중의 하나를 《동국여지비고》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깨끗하고 (세금)징수를 하지 않아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숭배한다"고 하였다.
제주도에도 최영 장군과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곳이 있는데, 바로 외돌개다. 고려 때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고인(蒙古人)인 목호(牧胡)들 3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범섬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최영 장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시켜 놓고 최후의 격전을 벌였고, 목호들은 외돌개를 대장군으로 알고 놀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목호의 난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다.
고려 말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혔던 왜구들은 최영 장군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고 한다. 한번은 최영 장군이 왜구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어떤 어린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오자, 장수들이 아이를 불러서 적의 동태를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왜적들은 오직 머리가 하얗게 센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 즉 최영 장군 만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영 장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우선 긍정적인 것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충신 중의 충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부정적인 것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고단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망해가는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못했고, 또한 중국 대륙의 왕조가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이성계 일파에게 불운하게 죽임을 당했다.
최영은 이성계 일파에게 죽임을 당할 때,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실제로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서 세간에서는 그의 무덤을 적분(赤墳)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 고집센 최씨를 가리켜 '최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고려사》에는 최영 장군이 처형을 당하면서도 의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형을 받으면서도 말씨나 얼굴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죽는 날에 개경 사람들이 모두 철시했으며, 멀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골의 여인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으며, 도당(都堂)에서는 쌀,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다.
최영 장군이 죽자 개성의 백성들은 이성계에 대한 원한으로 몇 날 몇 일을 통곡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최영은 곧 고려였던 것이다. 그후 전국 각지에서 최영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위한 사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정월 초하루에는 흰 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는데, 개성 지방에서는 조랭이떡으로 떡국을 만들었다. 조랭이떡은 일반적인 가래떡을 2cm 정도로 자른 뒤 가운데를 눌러서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속설에 의하면 대나무칼로 이성계의 목을 조르듯이 비벼서 떡을 썰어 만드는 풍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최영 장군을 죽인 이성계에 대한 고려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한 이야기이다.
최영 장군의 죽음으로 인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지만 개성의 민심은 이성계에 등을 돌렸다. 그 때문에 이성계는 개성에서 내몰려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를 해야만 했다.
최영 장군은 사후(死後)에 한반도 무속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숭배대상(장군신)이 되었다. 그의 삶이 청렴하고 군율이 엄정하였다는 점에서 영험함을 엿볼 수 있고, 또 그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사연이 너무도 억울해 원혼이 되어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50조 및 「금융투자업이해상충방지규정」
제15조 등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교보생명의 정보교류 차단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공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분 | 기초수급자 지원 | 영세자영업자 등 지원 | 개인워크아웃 (개인신용회복) |
개인회생제도 |
---|---|---|---|---|
신청기관 | 자산관리공시 | 신용회복위원회 | 신용회복위원회 | 법원 |
시행시기 | 2005년 5월 9일부터 6개월간 한시적 |
2005년 5월부터 시행 | 2002년 10월 1일부터 | 2004년 9월 23일부터 |
대상채권 | 1개 금융기관 단독채무자 및 다중채무자 모두 대상 |
1개 금융기관 단독채무자 및 다중채무자 모두 대상 |
협약에 가입한 2개 이상 금융기관 채권 |
제한 없음(사채 포함) |
채무범위 | 제한 없음 | 제한 없음 | 5억원 이하 | 무담보채무(5억) 담보채무(10억) |
대상채무자 | 기초수급자이면서 신용불량자 (2005.03.23 기준) |
|
신용불량자이며 최저생계비 이상 소득자 |
파산지경에 이른 봉급생활자 또는 영업소득자 |
채무조정수준 | 채무자의 총채무액을 채무조정을 통해 장기분할상환 |
채무자의 총채무액을 채무조정을 통해 장기분할상환 |
채무자의 총채무액을 채무조정을 통해 장기분할상환 |
8년 이내 변제기간에 채무자가 정한 변제계획에 의한 변제 |
신용회복지원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함
다음 사유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신용회복지원신청을 할 수 없음
지부명 | 전화번호 | 지부정보 (주소/위치 안내) |
---|---|---|
서울 명동본관 | 02-6337-2000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1가 10-1 명동센트럴빌딩 6층 (한국 외환은행본점 뒤편) |
서울 영등포지부 | 02-6337-2000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3가 18 영등포프라자 10층 (영등포 마사회빌딩 10층) |
부산지부 | 051-638-8890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825-3 (눌원빌딩 6층) |
대구지부 | 053-428-9360 |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 1가 6-1번지 (대우빌딩 4층(대구역 앞)) |
광주지부 | 062-233-1872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5가 127 (금호종합금융(주) 6층) |
대전지부 | 042-538-0320 | 대전광역시 중구 오류동 188-15 (사학연금회관 5층) |
인천지부 | 032-864-9460 |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동 205-11 (주안역에서 (구)시민회관 방향 400미터 전방) |
경기도지부 | 031-234-6108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1246 (경기지방공사 내 1층) |
의정부상담소 | 031-844-9848 |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 195-6 (의정부역앞 동부광장 건너편 한국시티(한미)은행 4층) |
원주상담소 | 033-764-1439 | 강원도 원주시 원동 58-1,마노벨라 빌딩 3층 (원주우체국에서 원주KBS방향 100m 지점) |
천안상담소 | 041-522-1459 | 충남 천안시 신부동 472-2, 천안축협 신부동지점 2층 (천안 시민회관 건너편) |
청주상담소 | 043-224-9521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21-2 (하나로상호저축은행 남문로지점 2층) |
전주상담소 | 063-253-5941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1220-1 (전주종합경기장 1층 직5문) |
울산상담소 | 052-260-9413 | 울산광역시 남구 달동 873-6 (삼호빌딩 3층) |
마산상담소 | 055-292-5495 | 경상남도 마산시 석전2동 259-6 (석전4거리 경남은행본점 옆 무학빌딩 3층) |
순천상담소 | 061-742-9415 |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206-2 (남교 5거리에서 순천여고 방향 30미터 지점) |
제주상담소 | 064-758-9413 | 제주시 이도1동 1736-1 (흥국생명빌딩 3층) |
강릉상담소 | 033-641-2765 |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95-3 (옥천오거리 인근 옥천빌딩 3층) |
광명상담소 | 02-2066-8539 | 경기도 광명시 철산 3동 384 (농협중앙회 광명시지부 지하1층) |
안동출장상담 | 054-851-6046 | 경북 안동시 명륜동 344 (안동시청 민원실) |
2004년 12월 31일 현재 신용불량자로서 다음의 요건을 충족하는 영세자영업자
2004년 12월 31일 기준 만 29세 이하의 미취업자로서 다음의 기준에 해당하는 채무자
2005년 4월 1일부터 6개월간
2004년 12월 31일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중
신용회복위원회 : 2005년 4월 1일부터 6개월간
2005년 3월 23일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지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중 전국은행연합회에 신용불량정보가 등록된 자로써,
지부명 | 전화번호 | 지부정보 (주소/위치 안내) |
---|---|---|
역삼본관 | 02-1588-3570 |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814 |
부산지사 | 051-860-8000 | 부산광역시 연구 거제3동 581-1 |
광주지사 | 062-231-3000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5가 183 |
대전지사 | 042-601-5163 | 대전광역시 둔산동 1264 |
대구지사 | 053-760-5000 | 대구광역시 수성구 중동 179 |
인천지사 | 032-509-1500 |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202-1 |
전주지사 | 063-230-1700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1280-11 |
창원지사 | 055-269-8071 | 경상남도 창원시 중앙동 94-3 |
강릉지사 | 033-640-3434 | 강원도 강릉시 임당동 139 |
청주지사 | 043-279-2400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35-14 |
각종 신용회복지원제도를 통해서 신용회복이 어려운 경우에는 법원의 개인채무자회생 제도 또는 파산제도를 이용하세요.
개인채무자회생제도는 2004년 9월 중에 실시할 예정이며, 파산제도는 이미 시행 중에 있어 언제든지 신청이 가능합니다.
MS 인터넷 익스플로러(IE) 브라우저 서비스 지원이 2022년 06월 15일 종료됨에 따라 교보생명 홈페이지를 보다 안전하고 원활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구글 크롬 브라우저 또는 MS 엣지 브라우저를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