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뭉태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매번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저 김유정이란 소설가가 야속하다. 야속하다 못해 분통이 터진다. 왜 나를 한 번도 자기 소설의 주인공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늘 주인공의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역할에 불과한 조연이었다. 좋은 역할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만무방을 대표하는 역할이 바로 나였다. 억울하기 이를 데 없다. 소설가가 살아 있다면 당장 달려가 따지고 싶을 정도로 분통이 터지고 울화가 치솟는다. 나, 뭉태, 결코 그렇게 야비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소설을 쓴 소설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고 그의 소설책을 일일이 수거해 내 역할을 바꿀 수도 없으니…… 하여튼, 뭉태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입장을 밝히려고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이다. 자, 내가 누군지 일단 들여다보시길.
뚝건달 뭉태는 콧살을 찡긋이 비웃으며 바라본다.
네나 내가 촌뜨기들이 떠들어 뭣하리. 그보다—
"여보게들 오늘 참 들병이 온 것을 아나? " 1)
뭉태는 나무에 비스듬히 자빠져서 하늘로 눈만 껌벅인다. 그리고 홀로 침이 말라 칭찬이다.
"먈갛고 살집 조트라. 내려씹어두 비린내도 없을걸—
제일 그 볼기짝 두두룩한 것이…… "
"나이는? "
"스물둘, 한창 폈드라— "
"놈팽이 있나? "
예제서 슬근슬근 죄어들며 묻는다.
"없어, 남편을 잃고서 홧김에 들병으로 돌아다니는 판이라데— " 2)
"저는 강원두 춘천군 신남면 증리 아랫말에 사는 김덕만입니다. 울 아버지가 승이 광산 김갑니다. "
두 손을 자꾸 비비더니
"어머니하고 단 두 식굽니다. 하치 못한 사람을 찾아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서른넷인데두 총각입니다. " 3)
"살재두 나는 인전 안 살 터이유— "
- 「총각과 맹꽁이」 중에서
1) 뜨거운 여름날, 덕만네가 도지를 얻어 부치는 밭에서 일을 하던 덕만이와 동네 총각들이 그늘 아래서 쉬는데 뭉태가 들병이 소식을 전한다. 총각들은 흥분한다. 「총각과 맹꽁이」의 시작 부분이다.
2) 남편이 없다는 말에 덕만은 뭉태에게 간청을 한다. 장가 좀 보내달라고. 들병이와 연결만 시켜준다면 술값은 자기가 다 내겠다고. 닭도 한 마리 내겠다고. 덕만은 뭉태의 약속을 받아낸 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몰래 닭장에서 닮을 한 마리 훔친다. 이윽고 뭉태네 집에 여섯 명의 총각들이 모여 들병이를 둘러싸고 술판을 벌였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들병이가 자기에게 올 차례를 기다리며. 맹꽁이가 우는 밤 들병이의 귀여운 신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던 우리의 착하고 순진한 덕만이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고 자기소개를 마친 뒤 절까지 한다.
3)하지만 형이라 믿었고 부탁까지 했건만 뭉태는 덕만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들병이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화가 난 덕만이는 들병이와 뭉태를 찾아 이슬에 젖은 콩밭을 뒤진다. 동은 서서히 터오고. 콩밭 한복판에서 엉겨 붙어 있는 둘을 발견한 덕만은 약속을 저버렸다고 뭉태에게 길길이 화를 내지만…… 덕만의 마지막 한 마디에 어디선가 맹꽁이는 여전히 맹꽁—! 맹꽁—! 울고 있고.
여기에 나오는 뚝건달 뭉태가 바로 나다. 이렇게 그려져 있으니 화가 치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가는 나란 인간을, 착하고 순박한 덕만이의 부탁을 저버리고 들병이를 차지하려는 욕정만 들끓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나는 억울하다. 물론 그날 밤의 일은 그렇게 돌아갔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내가 뭉태에게 약속이야 했지만 누구에게 가는가를 결정하는 건 들병이가 판단할 문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바보 같은 덕만이 놈밖에 없다. 내 말을 철썩 같이 믿다니. 들병이는 그저 내가 좋아서 나를 택한 것뿐이다. 그런 들병이에게 나 말고 덕만이한테 가라고 청한들 그녀가 제 발로 가겠는가. 그녀도 눈이라는 게 달렸고 생각이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아, 그날 밤 나는 덕만이 놈이 콩밭으로 던진 돌에 뒤통수까지 맞았다! 술값도 결국 내가 다 계산했다. 뭐…… 덕만이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고, 실레마을도 참 많이 변했다.
그 옛날 황량했던 실레마을이 이렇게 변하다니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는다. 실레이야기마을이라고? 이 마을 곳곳이 소설가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들병이들이 넘어오던 눈웃음길,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근식이가 자기 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그 세월이 흐르니 길의 이름 또한 변했다. 길만 변한 게 아니라 풍경도 많이 변했다. 금병산 중턱까지 모두 화전(火田)이었는데 지금은 낙엽송과 잣나무가 울창하다.
김유정 문학촌
저 아래 소설가의 생가 터에는 <김유정 문학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마을 전체가 정말이지 떡시루 속에서 나른한 가을볕에 취해 가만가만 졸고 있는 것만 같다. 다 좋다. 그런데 왜 내 길은 없는가. 뭉태란 존재가 소설 속에서 그토록 허접했단 말인가.
실제 소설 속 인물들이 살던 집의 옛 모습 (김유정문학촌 제공)
이런 기맥을 알고 년을 농락해 먹은 놈이 요 아래 사는 뭉태 놈이다. 놈도 더러운 놈이다.
우리 마누라의 이 낯짝에 몸이 달았다면 그만함 다 얼짜지.
어디 계집이 없어서 그걸 손을 대구, 망할 자식두. 놈이 와서 섣달 대목이니 술 얻어먹으러 가자고 년을 꼬였구나.
조금 있으면 내가 올 테니까 안 된다 해도 오기 전에 잠깐만, 하고 손을 내끌었다.
들병이로 나갈려면 우선 술 파는 경험도 해 봐야 하니까, 하는 바람에 년이 솔깃해서 덜렁덜렁 따라섰겠지.
집안을 망할 년. 남편이 나무를 팔러갔다 늦으면 밥 먹일 준비를 하고 기달려야 옳지 않으냐.
남은 밤길을 삼십 리나 허덕지덕 걸어오는데. 눈이 푹푹 쌓여서 발모가지는 떨어져 나가는 듯이 저리고.
마을에 들어왔을 때에는 짜정 곧 씨러질 듯이 허기가 졌다.
얼른 가서 밥 한 그릇 때려뉘고 년을 데리고 앉아서 또 소리나 아르켜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술집 옆을 지나다 뜻밖에 깜짝 놀란 것은 그 바깥 방에서 년의 너털웃음이 들린다.
얼른 다가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보니까 아 이 망할 년이 뭉태하고 술을 먹는구나.
입때까지 하도 우스워서 꼴들만 보고 있었지만 더는 못 참는다.
지게를 벗어 던지고 방문을 홱 열어제치자 우선 놈부터 방바닥에 메다 꼰잤다. (……)
년은 그대로 내버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놈을 찾으니까 이 빌어먹을 자식이 생쥐새끼처럼
어디로 벌써 내빼지 않았나. 참말이지 이런 자식 때문에 우리 동리는 망한다.
- 「안해」 중에서
이게 바로 「안해」의 거진 마지막 장면이다. 나, 뭉태가 내 돈 내어 술 사주다 개망신을 당하는 장면이다. 뭐? 나 때문에 동리가 망한다고! 내가 지 마누라를 꼬여냈다고? 지나가는 나를 먼저 불러서 수작을 걸은 게 놈의 마누라다. 제가 부르는 창가가 어떤지 한번 들어달라고 청한 것이다.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그건 창가가 아니라 돼지 멱따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못 볼 걸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떠나려하니 주막에 가서 술 한 잔 마시면 강원도 아리랑쯤은 어느 들병이보다 더 잘 부를 수 있다고 꼬드기는 게 아닌가. 아예 내 손을 잡고 끌다시피 했다. 그랬는데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까딱했더라면 놈이 휘두르는 지게작대기에 맞아 명을 단축할 뻔했으니. 앞뒤의 정황이 이러한데 소설가는 놈과 주막집 주인의 말만 듣고 나를 천하의 난봉꾼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억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저 아래 문학촌에서 김유정 백일장이 열릴 때마다 나를 욕하는 학생들을 찾아가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다한들 대체 누가 믿겠는가. 소설가 김유정의 무덤에라도 찾아가 항변하고 싶지만 애당초 화장을 하여 무덤조차 없다 하니……
실레이야기길을 걷는다.
밭에서 고구마를 캐는 아낙들. 금병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까마귀 울음. 은행은 구린내를 풍기며 익어가고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고 있다. 가을볕이 모처럼 따갑다. 야외무대에선 여 선생과 학생들이 마이크를 잡고 김유정의 「봄·봄」을 낭독하고 있다. 오래된 팽나무 아래에 잠시 걸터앉아 그 얘길 듣는다. 아니나 다를까. 또 내 이야기가 약방의 감초처럼 섞여 있다. 이젠 하도 들어서 화도 안 난다. 금병산 정상에서부터 단풍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한 일주일이면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온통 물들 것이다. 층층나무, 박달나무, 밤나무, 신갈나무, 그리고 동백나무까지 모두 물들었다가 어느 비 내린 다음 날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겠지.
김유정문학제가 열리고 있는 실레마을
"그래 맞구두 그걸 가만 둬? "
"그럼 어떡하니? "
"임마 봉필일 모판에다 거꾸로 박아놓지 뭘 어떡해? "
"밤낮 일만 해 주구 있을 테냐. "
"영득이는 일 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년이나 살구 더 살아야 해. "
"네가 세 번째 사윈 줄이나 아니. 세 번째 사위. "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 자식아, 우물에 가 빠져 죽어. "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 때까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팡 바꿔 들였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째 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 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 담으로 네 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일두 잘하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룩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셋째 딸이 인제 여섯 살, 적어도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 테므로 그 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리고
장가를 들여달라구 떼를 쓰고 나자뻐져라, 이것이다.
- 「봄·봄」 중에서
봐라. 내가 어디 허튼소리를 했는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다. 봉필이 영감은 애당초 데릴사위를 구한 게 아니라 부려먹을 일꾼을 구한 거였다. 그러니 화가 치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점순이 년도 마찬가지다. 결국 가재는 게 편이 아니던가. 다 내 충고 덕에 그나마 녀석이 쫓겨나지 않고 점순이와 혼례를 올린 것이다. 이래도 내가 소설가의 표현대로 뚝건달이고 동네를 망하게 할 사람이란 말인가. 나, 뭉태, 비록 가진 건 없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할 말은 하고 살았던 사람이란 얘기다.
김유정역. 실레마을을 우리 문화 유산으로 가꾸기 위해 2004년 12월 1일부터 역 이름을 바꾸었다.
아이고 힘들다!
예전 같았으면 지게 가득 나무를 싣고도 펄펄 날아다녔을 길인데 이젠 빈 몸인데도 발길이 무겁다.
실레이야기길을 한 바퀴 돌았더니 삭신이 콕콕 쑤신다. 어디 주막에 가서 코다리 안주에 막걸리나 한 사발 들이켜야겠다. 하기야 요즘은 들병이도 없는 세상이니 술맛이 날 리야 없겠지. 어째 옛 사람들은 다 떠나고 한 번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나만 남아 실레마을을 유령처럼 떠도는 기분이다.
멀리 김유정역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춘천 가는 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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