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는 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망가진 것들은 통증을 통해 존재를 알린다. 망가지고 있구나. 폭음을 하면서, 그는 그런 신호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훼손되어 가는 자신을 쓰다듬었을지도 모른다. 폐허가 풍요로울 수 있다면 죽음 근처일까. 사는 것이 악몽일진데, 우리는 이미 폐허의 풍요로움 속에서 진창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폭염이 시작되었다. 악몽으로 눈을 뜨고 악몽을 두려워하며 잠이 든다. 이것은 그저 더위 때문일 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 사람들은 자신과의 싸움, 타자와의 싸움, 세상과의 싸움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익숙해질까 봐 두렵고, 익숙해지지 않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영혼의 기후라는 것. 그리고 폭염은 그렇다. 무엇과도 멀어질 수 있고, 무엇과도 친해질 수 있다. 나는 여름이 되면 악몽과 친해 지고, 울음이 깊어지는 병이 있다. 그저 더위 때문일지 모른다. 램 수면이 불안정해서 그러겠지. 나는 매일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램 수면이 안정 곡선을 그리도록 치료 받아야 할 거야. 그러면서 나는 악몽과 친해진다.
그는 전쟁을 겪었다. 그것은 삶의 악몽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악몽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씩 건설되어야만 하는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1) 이 원고에 일괄 인용된 작품은 『박인환 전집』(맹문재 엮음, 실천문학사, 2008)이다.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 간 나의 친우는 어디서 만나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로 뒤덮어 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 「검은 신이여」 전문
그 시대에는 전쟁의 악몽을 나눠 가지며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공포의 극단에서 무엇이 덩어리처럼 서로를 덮어 쓰는지, 어떻게 추락하는지, 어떻게 비명을 삭히고 있는지…… ‘검은 신’은 사람들의 이마를 서늘하게 짚으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인지 그는 온몸으로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폐허이자, 바닥. 그는 그 폐허의 중심에서 시인의 예민한 감각, 같은 것을 괴로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안에 있는 더 깊은 웅덩이를 발견하고야 마는 시인이라는, 이상한 저주를. 나는 내 몸의 일부처럼 스며들어 있는 악몽을 일깨워 거리를 나선다. 폐허 이전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폐허는 더더욱 깊어진다.
박은정 시인과 나는 스콜이 쏟아져 내리는 아열대 기후의 한 가운데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 우리가 사는 곳은 아열대 기후가 되었다. 그녀는 얼마 전 강원도 인제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생가에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마리서사>를 찾아가 보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정확하게 찾기가 어렵대요.”
그녀가 전화통화를 끝내며 말했다. 한참 동안이나 파고다 공원 뒷골목 을 헤맨 뒤, 우리는 난감해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마 이 근처겠지? 이 근처에 있었을 거 같은데, 라는 말을 반복하며 파고다 공원을 중심으로 사방 골목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뒤였다. 결국 그녀는 선배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곳의 흔적을 확인했다. 우리는 물방울이 송송 맺힌 생수병을 열어 나눠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녀는 사실, 파고다 공원 뒤편의 풍경들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 폭염에, 많은 사람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꿈같은 잠을 청하는 사람들. 허리를 구부러뜨리고 머리는 가슴 쪽으로 묻은 채 쌕쌕거리며 잠이 든 사람들. 신발은 벗겨지고, 새까만 발바닥으로 제 몸의 끝을 보여주는 사람들. 그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나를 보았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곳에서나 폐허는 순간적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법인가.
낙원동 입구에 헌책방 <마리서사>를 열다
박인환 시인은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학교를 전전하다가 광복 즈음에 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한다. 종로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헌책방 <마리서사>를 열고 풍운아들의 아지트를 만들게 된다. <마리서사>에는 앙드레 브르통, 폴 엘리아르, 장 콕토 같은 시인들의 책과 세계문학전집, 일본 시전문지 등이 있었다. 박인환 소장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책표지가 상할까 이중의 표지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애서가였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서적은 황폐한 인간의 풍경에 광채를 띠었다.
서적은 행복과 자유와 어떤 지혜를
인간에게 알려 주었다.
지금은 살육의 시대
침해된 토지에서는 인간이 죽고
서적만이
한없는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 「서적과 풍경」 중에서
우리는 그의 흔적을 쫓아, 파고다 공원의 뒷골목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명동. 국내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서 국적불명의 도시가 되어버린 곳. 문화적 가치와 의미보다는 말초적인 소비가 넘쳐나는 곳. 그래서 이상한 방식의 설렘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 우리는 명동에 들어서자마자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 골목에 빽빽하게 가득 찬 사람들. 젊고 화려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곳. 극과 극의 세계를 이렇게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이면일까.
48년 마리서사를 폐업하기 전까지 <마리서사>는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성지 같은 곳이 되었다. 무엇보다 깔끔한 정장, 유니크한 더블코트, 부드러운 머플러, 그리고 세련된 구두를 늘 갖춰 입고 다니던, 패션 때문에 겨울을 좋아했던 그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이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키는 패셔니스타 박인환의 포스와 간지를 더욱 빛내 주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자의 감각. 시인에겐 그런 것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열정의 무늬들을 만들어냈다. 폐업하던 해에 김수영, 김규동, 김경희 등의 시인들과 『신시론』 제1집을 발간했고, 부인 이정숙 씨와 결혼을 했고, 경향신문사에 입사를 하는 등 뜨거운 기운이 넘쳐 나던 시기였다. 곧이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 발간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종로에서 이어지는 명동이라는 공간 전체가 열정의 무늬를 만들고 퍼뜨리는 힘이었을지도. 그렇게 명동이라는 이름은 예술가들의 꿈의 공간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름다운 꿈을 나눠 가지며 근대의 긴장과 아이러니 속에서 천변만화를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본가여
새삼스럽게 문명을 말하지 말라
정신과 함께 태양이 도시를 떠난 오늘 허물어진 인간의 광장에서는
비둘기 떼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신작로를 바람처럼 굴러간 기체의 증축은
어두운 외계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조종자의 얇은 작업복이 하늘의 구름처럼 남아 있었다.
- 「자본가에게」 중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쳐 걸으면서 우리는 ‘청동다방’이라던지 ‘동방쌀롱’이라던지 하는 그 당시의 예술 대안 공간으로서의 카페와 술집 등을 떠올렸다. 그는 더블코트의 깃을 한껏 세우며 이 골목들을 휘적휘적 걸어 삶의 안쪽에 숨겨진 슬픔들을 끄집어냈을 것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근대의 골목에는 그의 노래와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 피가 뜨거워서 무엇이든 질주하려고 했던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신의 시를 펼쳐 나갔다. 항간에 알려진 유명한 작품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도 이러한 뜨거움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보면 그는 그 두 편의 작품이 특이할 정도로 단단한 언어 감각들을 보여주고 있다. 몇몇 시들은 리얼리즘이라고 표현되는 현실의 핍진함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사르트르에 경도되기도 했다. 다양한 작품들이 거리에서 시작되어 가난한 골방에서 완성되는 순간들. 이곳에는 무엇보다 그의 시가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우리에게 대대로 그 상흔을 물려주게 될 거대한 상처. 거대한 회오리가.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
인간의 이지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
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다정했던 친우도 서로 갈라지고
간혹 이름을 불러도 울림조차 없다.
오늘도 비행기의 폭음이 귀에 감겨
잠이 오지 않는다.
-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중에서
우리는 명동예술극장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호흡을 느끼며 거대한 물결처럼 떠밀려갔다. 과거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사회는 어떤 흔적도 보관하려 하지 않고 파괴하려는 습성이 있다. 한국사를 통해 발견되는, 무엇인가를 향해 질주해야만 한다는 이상한 콤플렉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씩씩하게 거리를 걸었다. 앞으로도 이곳의 몇몇 공간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들이 건설되겠지만, 우리는 그의 절망과 고통의 숨결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악몽이든 시를 통해 싸워가게 될 것이다.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情死)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 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잠드는 것이다.
- 「행복」 중에서
그는 행복한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일까. 그는 1956년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을 열고 연이은 폭음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댄디보이의 폭풍 같은 삶에 어울리는 죽음, 이었다고 표현해도 될까. 죽음은 늘 삶의 곁에 있는 것이니까. 언제나 준비된 천사처럼 투명한 얼굴로.
나는 손가락으로 『박인환 전집』의 페이지들을 꾹꾹 누르며 그 감각들을 느껴본다. 그리운 것들. 그리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 적혀 있구나. 우리를 불행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위대한 힘, 그리움에 대한 것들. 모든 시는 잃어버린 피, 잃어버린 사랑을 몸속에 다시 흐르게 하는 데 바쳐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세월이 가면」전문
뒤늦게 ebs 방송 <명동백작>을 보면서 수시로 눈가가 젖었다. 방 안에서, 동네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그 시대의 시인들처럼 나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카페에서 사람을 만나고 카페에서 남몰래 운다.
우리는 카페에서 서로 만나지만, 헤어진다. 그러나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진짜로 만나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진짜로 헤어지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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