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제법 많은 비에 꽃들이 진, 그러나 그 비로 새잎이 더욱 청아한 날에 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를 찾았다. 백양로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가을이면 이 길을 노랗게 덮던 은행나무가 사라진, 회색의 시멘트로 덮인 백양로를 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혹여 치적의 풍진에 시인의 자취를 잃을까 염려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겨 시비(詩碑)부터 찾는다.
윤동주 시비는 1968년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가 설계한 것이다. 비문은 친우였던 유영이, 글씨는 서예가 박준근이 썼다. 시비의 앞면에는 친필「서시」가 아로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전문
「서시」 앞에 나를 세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두고 부끄러움과 괴로움과 사랑을 노래한 시인의 고결함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 부끄러움 때문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다짐 속에는 소멸하는 것에 대한 애정과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들끓는 고뇌 속에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지, 생각만으로도 애절하다. 마음이 자꾸 소슬해진다.
시는 물론이려니와, 비문의 한 구절도 가슴을 울린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 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구슬 같은 시들’,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 그리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함께 영원히 울려 퍼질 ‘시의 메아리’……. 그래, 윤동주가 거닐던 교정을 시의 메아리를 따라 걷기로 한다. 한 발 한 발 ‘주어진 길’을 가늠할 요량으로 「서시」를 되뇌며 걷는다. 이것이 오늘 나에게 ‘주어진 길’이므로.
시비의 자리는 ‘핀슨홀’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핀슨홀이 당시의 기숙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윤동주가 북간도 용정에서 광명중학을 마치고 연희전문에 입학한 것이 1938년 봄이고, 기숙사를 떠나 하숙생활을 시작한 것이 1941년 봄이므로, 만 3년을 이곳 핀슨홀에서 지낸 셈이다. 동주는 이때의 생활을 “이렇듯 수도생활(修道生活)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安堵)하였던 것”(「종시」)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소라 속’ 핀슨홀은 그의 생활과 학업의 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시세계의 모태였던 것이다.
‘윤동주 기념관’은 핀슨홀 2층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소라 속처럼’. 유고와 유품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육필 원고이다. 한 자 한 자가 참으로 경건하다. 시인의 순결함이 필체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겸허해진다. 청람(淸覽)이랄까, 마치 궁륭 속 성좌를 보는 듯하다. 육필 원고 곳곳에 썼다 지운 흔적마저 혜성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증언에 따르면 ‘밋밋하다’는 조언에 따라 덧붙여진 것이라 한다. 추가되었으되, 덧난 바가 없음은 무슨 재주인가?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게외다”가 저리 통렬한 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로 밤하늘의 별과 그리운 이름들이 덧난 바 없이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핀슨홀은 법인사무처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애써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이 좁은 공간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달랐던 시인에게 후배로서 부끄러운 마음부터 앞선다. 물론 한 시인을 기념하고 추모함에 있어 공간의 크기는 문제될 리 없다. 그러나 법인 사무를 보는 곳 한가운데 시인의 기념 공간이 있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요령부득이다. 다행히 2017년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핀슨홀 전체를 기념관으로 만든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안으로 삼으며, 아니 시인에게 진정한 창작의 산실(産室)은 ‘하늘과 바람과 별’의 대지일 것이 틀림없을 것이므로, 씁쓸함을 달래며 핀슨홀을 나선다.
안산 자락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교정과 숲길을 거닐며
시인이 학창시절 품었던 희망과 포부를 상상해 본다. 교정을 거닐며,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새로운 길」)이라 노래했던 시인. 그 길에 나의 학창시절의 기억을 잇대 본다. 설마 시인에게 누 되지는 않으리라.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본관 뒤편의 대우관의 자리는 연못의 자리였다. 작지만 매우 운치가 있던 곳으로 기억된다. 그곳에서 ‘아름겨움’ 친구들과 철학과 미학과 문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련함을 뒤로 하고 문과대학이 있는 외솔관에 들렀다. 문과대학 윤동주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띈다. 부디 앞으로 더욱 선양하시길…….
문과대학 뒤쪽 산길을 따라 언더우드 사택(현 언더우드가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처음 이 사택을 발견하였을 때가 1학년 봄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능선을 따라 길다란 담이 있었고 그 중간에 작은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너머에 언더우드 사택이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철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가 숲속 고택을 발견했을 때의 신비감은 지금도 형언키 어렵다. ‘제롬’이 ‘알리사’를 찾아들 때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 후로 나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일에 신앙처럼 열중했던 적이 있었다. 애석한 일은, 이곳 역시 윤동주의 ‘나의 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윤동주 시의 백미(白眉)라 할 만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러한 공간을 하나씩은 품고 있다. 《문우》지에 실린 「자화상」(원제 「우물 속의 자화상」)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우물’ 속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심정은 무엇일까? ‘한 사나이’에 대한 미움과 연민의 양가 감정이 떠남과 회귀의 반복 운동으로 나타날 때, ‘우물’은 그냥 우물일 수 없다. 정현종 시인은 이 ‘우물’을 “자기가 타자(他者)임을 알려준 우주적 거울”(「마음의 우물」)이라고 찬탄한 바 있다. 자기 자신을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과 함께 ‘추억’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우주적 시간 속에 융해된 것일 테니, ‘우주적 거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마음이 ‘우물’보다 웅숭깊은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물의 자리는 어디일까? 실제 우물의 자리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지금에야 우물이 희귀하지만, 당시에는 마을마다 한두 개씩의 우물은 있었을 것이기에, 그 자리를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연희동이면 어떻고 창천동이면 어떤가? 생각을 우물터에 붙박아 두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헤아릴 것은 시인이 산책을 즐겼다는 것, 학교뿐만 아니라 연희와 창천과 서강의 들판을 두루 돌아다녔다는 사실이다. 무릇, 산책이란 길을 걸으며 ‘마음의 우물’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마음의 우물’ 깊은 곳에 시의 두레박을 내려 내밀한 언어를 길어오는 행위, 그것이 시인의 산책이다. 그러니 우물의 자리는 마음의 자리일 것이다.
누상동 9번지 김송 소설가의 집터를 찾았다.
해질녘 연세대학교를 나와, 누상동 9번지 김송 소설가의 집터를 찾았다. 이곳이 한때 윤동주의 하숙집이었기 때문이다. 정병욱 씨의 증언에 의하면, 동주는 4학년이 되던 해인 1941년 5월부터 김송 소설가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41년 3, 4월에는 누상동 인근에서, 2학기에는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아쉽다. 아무튼 누상동 9번지에서의 하숙 생활은 꽤 재미있고 유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쓰인 작품들에는 깊은 고뇌가 배어 있다. 「십자가」가 더욱 그러하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부분
시인의 고뇌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고뇌는 점점 암울해져가는 시대와 민족의 현실을 포함하고 있다. “어두워 가는 하늘밑”은 이미 일제 말기 거대한 ‘병원’으로 화한 시대적 정황을 암유한다. 비록 그의 시의 표층에 일제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시의 중심부에는 국권의 회복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종교적 의장은 그 염결의 정신을 더욱 강화한다. 일종의 신앙의 회의기에 처했던 그로서는 “에게”와 “처럼”의 간극에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개인과 시대와 민족에 대한 번민 속에서 이 계절을 통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희생을 통한 회생의 삶.
이런 고결한 정신이 담겨 있는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시인의 생전에 출간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창씨개명과 일본 유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참회록」 1연의 “이다지도 욕될까”와 5연의 “슬픈 사람의 뒷모양”에는 시인의 고뇌가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백의 메모들은 또 어찌 볼 것인가? “시인(詩人)의 고백(告白), 도항증명(渡航證明), 상급(上級), 힘, 생(生), 생존(生存), 생활(生活), 문학(文學), 시(詩)란? 부지도(不知道), 고경(古鏡), 비애금물(悲哀禁物)”이 상흔처럼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비애금물’이 가슴을 울린다. 스스로 슬픔을 다잡으려는 마음이 더욱 애절하다. 아마 이런 참회의 마음으로 일본 유학 생활을 견뎠으리라.
누상동 9번지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이제 어디에서 그의 발자취를 좇을 것인가? 1942년 봄에 릿쿄대학에 입학하였으니 도쿄에 가 볼 일인가? 그해 가을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전학하였으니 교토로 가야할 것인가? 1943년 7월 교토의 시모가노 경찰서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기까지의 행적을 따라가 볼 것인가? 그의 마지막 발자취를 좇는 일은 추모와 애도의 차원에서 대단히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정말 ‘시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릿교대학 시절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5편의 시가 실려 있었는데, 그 중 한 편에서 그것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시」 부분
시인의 마지막 족적의 자리는 어디인가?
‘육첩방’, ‘늙은 교수의 강의실’, ‘창밖’, ‘시대’……. 추측컨대, 그곳은 ‘육첩방’과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사이, 그러니까 ‘등불’이다. 달리 말하면 이렇다, ‘육첩방’은 그의 최후의, 마음과 세상이 교직하는 십자가라고. 그리고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는 그 십자가에 남긴 마지막 ‘시의 메아리’라고. 그러므로 ‘등불’은 시이다. 그리고 여기가 그의 마지막 족적이 남겨진 자리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간절히 바란다, 풀들이 무성한 이 봄날, 연세대학교에도, 도시샤대학에도, 후쿠오카 형무소에도, 그리고 그의 고향 용정의 무덤가에도 ‘자랑처럼’ 시의 메아리가 영원하길.
-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