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소년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물장난치는 소녀를 본다.
요행히 지나는 사람이 있어 길을 비켜줄 때까지 소년은 개울둑에서 소녀를 바라본다. 둘째 날, 다시금 소녀는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있다. 이번에는 물을 움켜쥐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리고 흰 목덜미를 드러내며 세수를 하다 물고기를 잡는 시늉을 내다...... 소년은 또 기다린다. 길을 비켜 달라, 좀 지나가자, 그런 말을 소년은 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말을 건네는 것, 조약돌을 날리며 이 바보, 라고 외치는 건 소녀, 당돌한 이 아이는 조개의 이름을 묻고 물고기를 묻고 저 산 너머 먼 곳, 보기보다 먼 그곳으로 가자 조른다. 세 번째 만남에서다.
논둑길을 걷고 들을 지나고 맵고 지린 맛의 무를 뽑아 먹던 그 길에서 소년은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 마타리꽃, 이름을 알려주고 칡뿌리를 이로 끊어 꽃을 꺾어다 주고 코뚜레도 꿰지 않은 어린 송아지의 등에 올라타는 모험을 감행한다.
순전히 소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칡뿌리를 자르려다 넘어진 소녀의 무릎에 상처가 나고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대고 빨아준다. 첫 번째 스킨십, 꽤나 과감하다.
갈꽃무더기 속에서 움직이는 소녀, 소년의 가슴이 사납게 뛰고
마침내 소나기가 내린다.
겨울 한가운데, '소나기 마을'에는 소나기 대신 눈이 쌓여 있었다.
관장님께서 내주신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나온 복도, 기둥 마다 방문객들의 소원을 적은 알락달락한 메모지들이 작은 비늘처럼 붙어 있었다. 누구와 누구는 사랑하노라, 누구는 정말 예쁘다, 누구는 꼭 대학에 붙을 것이다…… 소박하고 정겨운 바람들이다.
제1전시실, 황순원 선생님의 일대기가 사진과 자료들로 요약된 곳이다. 선생님께서 쓰시던 작은 책상, 나지막한 병풍, 막 벗어 놓으신 듯 선생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옥색 두루마기…… 벽 한가운데 걸린 액자의 힘찬 글씨는 중관 황재국 선생의 솜씨이다.(문학관 입구 현판과 '소나기마을'의 표지석 역시 황재국선생의 작품이다). "味道居眞(미도거진)", 1980년 선생님의 퇴임을 기념해 써드린 것이라 한다.이제 그간의 긴 어려움을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즐기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십사 하는 염원을 담았다는 설명이었다.
본래 자상하신 분이지만 황재국 선생께 소나기마을에 대한 글을 쓰려 하노라, 전화를 드렸더니 황순원 선생님과 관련된 일화를 조목조목 들려주셨다. '文 者 求 道 之 器 也' 황순원 선생님이 쓰신, 도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뜻의 이 일곱 글자가 자료관에 보관된 사연도 황재국 선생의 서예전을 방문하셨던 선생님께서 방명록에 남기신 것을 액자에 넣어 기증하신 것이란다.
「늪」, 「기러기」, 「목넘이 마을의 개」,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등의 초판본과 육필원고, 황고집이라 불리던 부친의 사진과 숭실학교 졸업앨범 속의 원빈 저리가라 할 꽃미남인 황순원 선생님을 차례로 훑으며 전시관을 나오기 직전, 사진 속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으시던 날의 선생님 옆에 어디서 본 듯한 여자 하나가 있다. 마치 수상자인 양 자랑스레 웃고 있는 조교 시절의 나…… 내게는 없는 사진이다.
소년과 소녀가 앉았을 법한 작은 책걸상이 놓인 교실에는 비뚜룸히 걸린 액자가 있고 급훈이 있고 태극기가 있고, 커다란 화면이 있다. 소설 소나기의 줄거리를 애니메이션으로 극화한 영상물을 보여주는 곳이다. 떠난 소녀를 그리워하는 소년이 학과 함께 찾아온 소녀와 재회하는 곳이다. 소나기를 만난 장면에서는 실제로 천둥이 울리고 천장에서 소나기─사실은 안개비─가 내린다. 소녀가 다시 떠난 하늘 저편에 무지개가 걸렸던가. 어둑한 실내를 돌아보다 괜시리 책상 위에 걸터앉아 본다. 선생님이 안계시니까. 생각해보니 나는 초등학교 내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번도 책상 위에 앉아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선생님이 계시거나 말거나, 가여운 모범생 역할에 충실했던 것.
전시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면 볕바른 곳에 황순원, 양정길, 두 분의 묘소가 있다.
1915년 생, 우리나이로 백수를 누리시며 선생님의 기일마다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사모님께서는 작년 9월,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라 떠나셨다. 묘역을 지나 나무계단을 밟으며 걸음을 옮긴다. 고향의 숲, 해와 달의 숲, 학의 숲, 그리고 송아지 들판을 넘으면 오롯이 나타나는 침엽수 빼곡한 오솔길, '고백의 길'이다.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고백할까. 종내 소녀에게 건네지 못했던 알 굵은 호두를 만지작거리며 밤길을 걷던 소년처럼,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주머니에 간직하던 그 마음 같은 아련함에 젖어 수수단 오솔길로 접어든다.
매운바람이 부는 소로에는 하얀 눈이, 아무도 밟지 않은 희고 정결한 눈이 쌓여있었다. 뽀드득, 내 발걸음이 내는 소리에 청솔모 한 마리가 호르르 달아났다. 마른 갈대가 우거진 길의 이름은 '너와 나만의 길'이다. 고백을 하였으니 이제 너와 나만이, 둘 만이 다정히 길을 걸어보라는 것일까. 소녀가 한 무더기 갈꽃을 꺾어 안고 갔던 길, 둥둥 떠가는 갈꽃만이 소년의 눈을 어지럽게 했던 그 길 역시 겨울 오후의 적요에 잠겨 있었다.
소년과 소녀가 건너던 징검다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좀 더 먼 길을 가야한다. 운치 있는 나무계단이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얼어붙은 개울 둑…… 얼어 희게 빛나는 개울물. 몇 번을 망설이다 쌓인 눈이 무서운 나는, 넘어지면 잡아줄 소년이 옆에 없는 나는 그 길을 포기하고 원두막과 수수단 광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소설 소나기의 백미는 역시 소년과 소녀가 비를 피해 원두막으로 찾아드는 장면이다.
영화 '클래식'에서, '엽기적인 그녀'에서 또 무슨 무슨 드라마에서 거듭 반복, 재생되는 부분이다. '클래식'에서 교복을 입은 조인성과 손예진은 웃옷을 우산 삼아 어깨를 맞대고 들판을 달리고 화면 저편에서는 서정적인 노래가 깔린다. "너에게 난 해질 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른 날을 기억하며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자전거 탄 풍경'이라나. 가수의 이름마저 서정적이다.
소년과 소녀는 연잎조차 없이 들을 지나 원두막으로 스며든다. 낡아 비를 막아주지 못하는 원두막에서 파랗게 입술이 질린 소녀에게 무명저고리를 벗어 입히고 소년은 수수단을 세워 고깔모양의 작은 처소를 만든다. 얼기설기 세웠어도 수수단 안에는 비가 새지 않는다. 다만 너무 좁아 밖에 앉은 소년의 어깨가 고스란히 비에 젖을 뿐. 안으로 다가앉으라는 소녀의 말에 주저주저하며 다가든 소년, 둘의 무릎이 부딪는다. 두 번째 스킨십. 소년의 가슴이 쿵, 했을 터이지만 작가는 그런 서술 따위, 하지 않는다.
소나기 마을의 수수단은 제법 튼실하다. 어른 두 사람이 너끈히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비를 피해보라고, 소년과 소녀가 되어보라고 소나기 마을에는 매 시간마다 소나기가 내린다. 갑자기 내린 비에 젖으면? 그럴까봐 낭랑한 음악이 친절하게 울리고 다음 순간 벼락처럼 물줄기가 쏟아진다. 아주 잠깐 동안. 진짜 잠깐. 좀 오래 내리게 하면 안 되는가, 너무 아쉽지 않은가 물었을 때 관장님의 답은 이랬다. “아쉽게 지나가는 거, 그게 소나기죠.”
소나기가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불어나 흙탕물이 된 개울을 건너기 위해 소년은 등을 돌려 소녀를 업는다.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차오르고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는다.
세 번째, 소녀의 스웨터에 검붉은 흙물이 들게 만드는 결정적인 스킨십.
소년과 소녀가 마지막 만나는 곳도 개울가, 징검다리다.
해쓱해진 소녀는 며칠 앓았다, 한다. 하도 갑갑해 나왔다, 하던 소녀는 집을 내주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사를 가게 되었다, 고 말한다.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
하면서 소년은 애꿎은 호두나무를 마구 마구 후려친다.
소녀의 집 제사에 중닭 한 마리를 가져가려는 아버지께 저 큰 놈으로 가져가지, 저 얼룩수탉으로, 말하는 게 고작이다.
공연히 열적어 외양간의 쇠등을 철썩 갈기는 게 전부다.
소나기 마을에도 올라 앉아볼 수 있는 음전한 표정의 소가 한 마리 있으니 기념촬영 정도는 좋지만 소년처럼 등을 후려쳐 보고 싶더라도 참아야한다. 단단한 옹기재질이므로. 수수단을 빠져나와 마지막으로 미니 징검다리 쪽으로 향한다. 개울가의 징검다리를 가지 못한, 나처럼 소심한 이를 위해 마련해둔 길을 굵은 호두를 따 주머니 가득 넣고 열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을 골라 디디며 돌아오는 소년이 그랬듯 조심조심 디뎌본다. 개울가로 나와 달라 약속을 하지도 못했던 소년, 혼자 속으로만 바보, 바보, 외쳤던 소년처럼, 하지 못했던 말, 하지 않았던 약속, 어딘가로 흘러가버린 시간이 내게도 있었을까. 붉은 흙물이 배인 스웨터가 있었을까.
물 마른 조약돌이 어느 어름에 남아 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눈이 먼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약속 장소에서 몇 번이고 좌석까지의 길을 가고 또 가며 연습하던 영화의 주인공처럼 우리 모두는 그렇게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 연습하고 또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는지. 결국 들키고 마는, 옛 여인의 눈물 흐르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장면의 배경음악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우리 이제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길…… 절규하는 부분이 저마다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우리의 소녀는 그러나 '입던 옷 그대로 묻어 달라' 유언을 남기고 떠난다. 야무지고도 애틋하다. 그 한마디로 인해 빈 들판의 허수아비를 흔들어대던 소녀가, 등에 업혀 목을 끌어안던 손길이, 수수단 안에서 시든 꽃을 모으던 소녀의 손마디 하나하나가, 이 물이 어디서 들었는지 내 알아냈다, 며 배시시 웃던 그 얼굴이 소년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도.
소녀가 되고 싶던 시절,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던 시절.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죽거나 그 누군가가 죽어야만 했으므로 부러 죽었다, 생각하려 애쓰던 어느 한 때를 떠올리며 돌아오는 길, 언 강 위로 쌓인 눈이 석양에 희게 빛났다.
글 / 서하진
소설가,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0년생.
-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